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이야기 말미에 기사단들의 뒷이야기가 있다.
사실상 십자군전쟁을 수행하고 200년이 넘도록 전쟁을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었던 기사단은 대부분 평민 출신의 독신이었던 성당기사단(템플기사단)과 십자군 전쟁 이전부터 순례자들의 병을 치료하던, 대부분 귀족 출신들로 구성된 병원기사단(성요한 기사단), 그리고 독일기사단(튜튼기사단)등이 있었다. 그 중 전쟁 내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웠고 십자군의 철수를 끝까지 반대하며 수도 많았던 성당기사단(템플기사단)은 막상 십자군 전쟁이 끝나자 오히려 유럽의 기독교 세계에 부담이 되었다.
템플기사단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 수도원을 짓고 일반인들에게 높은 신뢰와 인기를 얻어 영향력이 더욱 커지자 왕이나 교황청은 기사단 자체를 이단으로 몰아 화형을 시킨다. 이떄 희생된 기사단원이 3만이나 된다고 한다. 종교적 신념으로 목숨을 바쳐가며 싸운 결과가 너무 참혹하다. 모든 전쟁이 다 그렇지만 특히 십자군 전쟁만큼 인간을 도구로 여긴 전쟁은 없다고 생각한다. (형편없는 판단력으로 프랑스군 5만명을 잃은 앙리 4세의 성인 칭호 수여와 기독교인의 성지이자 애초 십자군 파병의 목적이자 명분이었던 예루살렘을 이슬람 왕 살라딘과의 협상 끝에 싸움없이 되찾아온 프리드리히 2세의 파문, 이교도와 협상하지 않았다. 협상했다는 말도 안되는 기준으로)
병원기사단은 본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지중해의 로도스 섬으로 들어가 성을 쌓고 기독계계 국가에겐 지중해 무역의 중간 기지 역할을 하는 동시에 투르크의 무역선을 약탈하는 해적으로 300년 이상 번영을 누리다가 16세기에 오스만 투르크의 슐레이만대제에 패해 몰타와 크레타로 근거지를 옮겨 계속 세력을 유지한다.
독일 기사단 역시 본국으로 돌아가면 안되는 현실 파악을 했던 것 같다. 당시 덴마크의 지배하에 있던 탈린으로 와서 이곳을 점령한 후 성을 쌓고 한자동맹의 무역 중심지로 발전시킨다. 독일로 돌아가지 않고 독일의 지배세력과 충돌하지 않으면서 한자 동맹을 통하여 독일과의 관계도 유지한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때부터 탈린은 지배세력을 바꾸어가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발트해 무역의 중심지로, 또는 해군기지로 발전하게 된다.
발트 계열의 에스토니아 인들은 13세기초부터 거의 외세의 지배를 받았다. 1219년 당시 이 지역의 강대국이었던 덴마크의 발데마르 2세가 이곳을 점령해 덴마크의 지배를 받다가 1227년 독일기사단이 이곳을 점령하면서 게르만의 지배하에 놓인다. 그러나 30년가량 유지되던 이들의 세력은 1258년 다시 덴마크가 다시 재점령하지만 한자동맹에 가입하고 한자동맹의 중심도시가 되었기 때문에 계속하여 게르만의 영향력이 이어지다가 1346년 덴마크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다시 독일인이 이 지역을 지배하게 된다. 스웨덴의 힘이 강하던 17세기초 스웨덴의 지배시절은 에스토니아의 황금시대로 에스토니아 문자가 생기고 타투르대학도 설립되었다.
그 후 러시아의 표토르 대제가 스웨덴과의 21년 전쟁에서 승리한 후 이곳은 다시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고 표토르대제는 탈린을 그 유명한 발틱함대의 기지로 삼는다. 1918년 2월 독립을 선언하고 1920년에 독립을 하지만 그것도 잠시, 1936년 독소불가침조약과 2차대전으로 소련에 편입되게 되고 긴 세월을 공산주의 소련의 연방으로 남았다가 1989년에 발트의 길, 노래 혁명 등으로 서방에 알려진 독립 운동을 거쳐 마침내 1991년 우리가 뉴스에서 보았던 '발트해 3국 소련으로부터 독립'이라는 사건을 맞게 된다. 현재 나토와 유로 회원국이며 쉥겐가입국으로 국경통행이 자유롭고 유로화를 사용한다. 1인당 GDP는 약 2만8천불, IT산업이 발전한 나라다. 스카이프가 에스토니아 것이라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루터교를 국교로 삼고 종교세를 납부하지만 어떤 종교든지 외세 지배의 한 형태였을 뿐 실제 에스토니아 사람들은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래서인지 교회 건물은 크고 아릅답고 화려했으나 실제로 미사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독립 이후에도 남아 이곳에 거주하는 러시아 사람들이 정교회 교회에서 미사를 드린다고 한다.
구시가지는 톰페아 궁을 중심으로 한 고지대와 북쪽의 저지대로 나뉜다. 구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탈린은 전체가 해발100미터 이내의 해안 평야지대여서 해발 100미터 남짓의 톰페아의 전망대에 서면 구시가지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호텔 인근의 외곽 주택가 풍경
구시가지 톰페아 입구
톰페아궁 맞은편에 위치한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러시아정교회 성당
톰페아궁, 지금은 의사당으로 쓰인다.
교회로서의 기능은 잃어버리고 박물관이 되어버린 루터교회
톰페아전망대에서 바라본 구시가지 모습
톰페아 전망대 옆 기념품가게의 한자동맹 문장과 기사단 갑옷
에스토니아 독립을 위해 싸우다 희생된 이들에 대한 기억.
고지대 거리 모습
간판들, 잘츠부르그의 간판과 달리 이곳의 간판은 상점의 테마가 아니라 거리를 표시한다.
시청사 앞 광장
저지대 구시가지 입구인 비루게이트, 예전에 6개의 성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두개가 남아있고 그나마 주변이 공사 중이어서 ,,,
나는 이번 여행에서 노르웨이 다음으로 탈린에 대한 기대가 컸다. 도착한 날 저녁, 호텔 주변을 산책하는 대신 구시가지로 나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다음날 비내리는 탈린 시가지에서 겨우 한나절 머물러 톰페아궁과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성당을 비롯한 구시가지 몇개의 건물을 보고 전망대에 올라 저지대 시가지를 내려다았다. 숲과 오래된 건물과 둥근 탑이 군데군데 솟아있는 시가지 풍경은 이국적이고 충분히 아름다웠지만 더 천천히 골목을 쏘다니고 현지 음식을 먹고 저녁나절 광장에서 사람들과 어울려도 보고 싶지만 한나절 골목길을 누비고 다니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시청사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골목길에는 특이한 간판이 걸려있었다. 장화 모양도 있고 주전자 모양, 화로모양이 있다. 잘츠부르크의 간판은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도 쉽게 알 수 있도록 취급하는 물건을 알려주는 것이라면 이곳은 주소를 표시하는 것이라 한다. 긴 장화모양이 걸린 곳은 '목이 긴 신발 거리'라고 한다.
바닥이 돌로 된 길을 걷는 것은 조금만 해도 피곤해진다. 아픈 다리를 쉴겸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나니 금방 출발 시각이 다가왔다. 탈린이 요새였던 시절 출입을 통제하던 입구 비루게이트 근처 중국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유럽에 오면 중국음식을 먹는다. 아이러니다.
비가 내리는 길을 달려 러시아로 향한다. 아무리 시야가 트여도 지평선밖에 없다. 중부 유럽 북쪽은 평평한 대륙임을 다시 실감한다. 비는 계속 내리고 길가에 집들도 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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