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만난 이야기/해외여행기

여행은 언제나 정답이다. 스웨덴 2. 스톡홀름에서 부국의 전형을 보다.

목인 2016. 8. 31. 14:07

칼스타드(스웨덴어: Karlstad)는 스웨덴의 도시로, 베름란드 주의 주도이며 면적은 42.16㎢, 인구는 104,232명(2010년 기준), 인구 밀도는 2,472명/㎢이다. 베네른 호 북안과 클라레블렌 삼각주 지대와 접한다.               <위키백과의 짧은 설명>


카를스타드(Karlstad)

클라르 강 어귀의 베네른 호 북쪽 기슭과 팅발라 섬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 그곳에서 열린 의회 모임인 팅(ting)을 따서 팅발라로 불렀으나, 1584년 이곳에 자치시로 칙허를 내린 카를 9세를 기념하여 개칭되었다.      

1645년에 대성당이 세워졌고 1779년 주도가 되었다. 1905년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통합문제를 결말짓는 협상이 열렸다.

1865년 화재로 거의 전소되고 난 후, 넓은 대로와 큰 공원을 갖춘 근대적 도시로 재건되었다. 이전 건물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클라르 강에 놓인 동교(1761~70)에는 13개의 인상적인 아치가 있다. 박물관에는 베름란드에서 수집된 미술품과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다. 1970년 예테보리대학과 자매결연을 맺은 카를스타드대학이 설립되었다.

산업은 주로 임산물과 중장비 기계류에 기초를 두고 있다. 예테보리와 북해를 거쳐 대서양과 연결되어 있어 수출입 무역량이 많다. 인구 76,467(1991).

                                                                                             <다음백과사전>


칼스타드 역 바로 앞에 위치한 호텔은 작지만 별네개짜리 깨끗하고 컨디션이 좋았다. 아마도 리모델링을 한 모양으로 호텔 안에는 오래된 건물의 흔적이 곳곳에 있었는데 엘리베이터가 영화에서 보던 2인용으로 두사람이 타면 짐을 실을 수 없을 만큼 작고  철문을 손으로 열고 들어가 버튼을 누르고 다시 손으로 문을 닫는 형식에다가 올라가고 내려갈 때 굵은 쇠줄이 그대로 보이는 고색창연한 것 하나와 6-7인용 빠르고 편한 현대식 엘리베이터 둘이 있었다. 선이와 나는 재미로 좀 많이 기다리고 불편한 구식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렸다.

방에 짐을 풀고 올 때 보아두었던 강가 공원과 카페가 있는 쪽으로 산책을 갔다. 많은 사람들이 긴 낮을 즐기고 있다. 강을 끼고 있는 도시는 대개 아름답다. 칼스타드의 도심은 강 건너편에 있고 극장과 성당, 관공서 풍의 건물들 위로 저녁 노을이 내려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였다. 극장으로 보이는 건물에 뮤지컬 '레 미제라블' 공연 현수막이 크게 붙어 있다. 인구10만이면 겨우 내가 사는 영주만 한 도시인데 저런 공연이 몇주간 유지된다는게 신기하고 부럽다.

고목과 잘 가꾸어진 꽃과 잔디와 강변과 한적한 주택가 골목이 어우러진 풍경을 즐기며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클라렌 강가에 배모양으로 지어진 카페에 들어가 맥주 한잔씩 마셨다.

 

칼스타드의 아침 햇살은 맑고 투명했다. 일찍 일어나 식사를 하기 전 역 앞 대로를 따라 어제와 반대 쪽으로 산책을 헀다.

칼스타드에서 스톡홀름으로 이어지는 길은 전형적인 유럽의 풍광을 보여주는 널찍한 고속도로였고 주변에는 밀밭(보리밭인지?)과 자작나무, 가문비나무, 전나무 숲, 그리고 간혹 호수와 습지가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휴게소도 규모가 크고 현대식이 많다.

스톡홀름 시내에 들어가기 직전 이민자들이 주로 사는 거리인 듯 약간은 추레해보이는 거리의 중국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중심가로 들어갈수록 아름답고 여유있어 보이는 거리로 바뀌어 가고 그 끝에 스톡홀름 시청사가 있다. 현지 가이드로 나온 분은 젊고 세련되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나이가 꽤 들었을 걸로 짐작되는 여자분인데 여기 공부하러 왔다가 눌러 살게된지 30년쯤 되었다고 한다. 인생의 어느 순간 삶의 방향을 확 바꾸어주는 그런 선택을 할 기회를 만난 사람은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늘 생각한다. 미국의 메릴랜드에 살고있다는 초등학교 동창 수진이는 어떤 순간의 선택이 그 먼 이국땅에서 살게 했을지 가끔씩 궁금해진다. 내 사주엔 역마살이 있다고 한다. 타고난 방랑끼가 살이 아니라 하나의 취미가 되어도 괜찮을 시대에 태어난 것을 보면 나도 꽤 운이 좋은 편인 것 같은데 300년 전에 조선의 여자가 역마살을 가지고 태어났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생각만해도 아찔하다. 어쨌든 멀고먼  이국의 땅에서 반평생을 살아온 내눈에 매우 멋져보이는 그분은  나즈막하고 차분하고 지적인 음성으로 시청사 내부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놀랄만큼.

그분의 설명은 대단히 체계적이고 훌륭했지만 그분과 함께 스톡홀름 시청사 내부를 관람하고 나서 나는 문득 회의가 들었다. 친구들이나 선후배들의 나의 기억력에 대해 감탄하거나 놀라는 칭찬(?) 익숙해 온 나지만 지만 이젠 정말 용량의 한계를 느껴 후기 작성의 방향을 바꾸어야 겠다고 결심했다. 아는 것, 알 게 된 것은 어차피 인터넷 검색을 이기지 못할 텐데 하나하나의 사실에 대해 정확하게 쓰려고 하니 힘들다. 더 정확히말하자면 후기를 쓰는 것이 여행의 스트레스가 되어버린것 같다. 보고 들은 것 들 보다는 돌아와서도 기억에 남는 것만큼만 써야 겠다.

'말괄량이 삐삐'를 쓴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스웨덴 사람이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시청사의 호화로운 방과 여러가지 장식 벽그림, 조각, 그리고 시청사를 설계한 랑랄스 베리의 흉상, 실제 건축을 한 에이날 호세아니의 상, 노벨상 시상식이 열리는 방, 사회주의가 가미된 민주주의의 모범인 시의회 회의실과 의원들의 좌석들을 둘러보며 너무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 빠졌다가 시청사를 나오니 탁트인 광장 너머로 바다가 있고 요트나 카약을 타는 자유로운 사람들이 보였다. 청사 건물의 호화로움보다 이런 사람들의 삶을 가능케 하는 소프트웨어가 부러웠다.    





시의회와 의원석

뒤집으면 지붕이 되는 바이킹의 배, 원정을 나가면 배를 뒤집어 그 아래서 생활했다고 한다.







스웨덴의 역사와 사람들의 생활, 성경이야기 같은 것이 표현된 벽화가 있는 황금의 방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표현한 것인 듯

시청사 건너편 건물


바사호 박물관 가는 길가의 항구

바사호 박물관으로 이동했다. 발트해 건너 독일에서 먼저 일어난 신교(루터교)를 국교로 삼은 스웨덴은 신구교간의 갈등으로 촉발된 종교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 전쟁을 위해 건조된 배가 바사호인데 기능보다는 부를 과시하기 위한 장식이나 규모에 너무 집착해서였을까 단 한번의 항해도 성공하지 못하고 침몰해 버린다. 이후 300년 넘게 바다에 가라앉아 있다가 인양되어 현재의 바사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에 들어서자 말자 퀴퀴한 냄새와 분위기가 발을 들여놓고 싶지 않게 해서 별로 즐겁지 않은 마음으로 둘러보고 얼른 나왔다.

디행인 것은 귀족들만 먼저 타고 출항 시범 운행을 했기에 깊숙한 선실에 있었어야 할 목수나 요리사, 노젓는 이들 등 평민들은 화를 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사호



배의 앞머리, 호화로운 장식은 운동 저항을 높였을 거 같다.  

배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복원한

배에 탄 사람들 을 하는 일과 신분 같은 것을 일일이 헤아려 적어놓았다.

구시가지 감라스텐지구의 오아궁 앞, 왕족의 결혼식이 열린다는 교회

달을 보는 소년


구시가지의 골목

기네스북에 올랐다는 세계에서 가장 좁은 골목


사람들 앞이 좁은 골목의 내려가는 쪽 입구

아버지가 아들에게 만들어 준다는 장난감 목마

오래 된 우물 둘 중 덜 예쁜 하나


한림원 앞 광장의 아름다운 우물

스웨덴 한림원

1500년대와 1600년대에 지어진 건물

목소리도 외모도 매력적인 버스커


스웨덴 왕궁

바이킹 라인이 출발하는 항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