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다에서 세비야까지는 거의 4시간이 걸렸으나 꿈같은 초원을 달리는 길이어서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늦은 오후, 차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의 각도가 낮아질 무렵 세비야에 들어서자 스타디움 하나가 보였다. 축구광인 신랑은 금방 알아본다. 레알 배티스라는 세비야 기반 축구팀으로 성적이 3,4위 정도 하는 꽤 잘하는 팀 홈구장이라고 한번 가봤으면 했지만 그냥 지나친다.
버스는 우리를 다른 스타디움 근처에 내려놓았는데 거기가 바로 오늘 우리가 잘 호텔이었다.
호텔이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경기장으로 쓰였던 스타디움의 관중석 뒤쪽 아래 공간에 들어선 독특한 형태여서 스타디움에 들어가 볼 데가 있나 한바퀴 돌아보아도 문이라곤 다 잠겨있고 그 외엔 구멍이 없다. 운동장 관중석 아래 공간이 카페, 사무실, 호텔, 창고나 물류센터 같은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고 있다.
다른 이들은 플라멩코를 보러 가고 우리 부부는 근처 산책 겸 신랑 감기약을 사러 나갔다. 10분 쯤 걸어가니 강이 있고 유람선도 다닌다. 바로 과달끼비르강이다. 이 강 덕분에 콜럼부스가 신대륙으로 떠날 때 이 곳 세비야가 출발지가 되었다. 강가로 넓은 공원이 있고 암벽타기를 하는 사람들, 달리는 사람, 자전거 타는 사람, 유모차를 끌고 산책하는 사람, 정말 활기차게 살고들 있다.
약사가 영어를 못해서 열은 없고 기침 좀 하고 목이 아프고 그런 정도의 증상을 이야기하는 정도도 오래오래 걸린다. 오다가 길에서 만나 약국 가는 길을 물어봤던 어떤 여자는 너무나 유창하게 영어를 잘하던데. 그래도 어쨌든 겨우겨우 원하는 감기약을 사고 커피를 마시고 호텔로 돌아왔다.
늦은 저녁을 먹고 올라오는 길에 로비 한쪽에 놓여 있는 캡슐커피를 한잔 마셨다. 뭔가가 문제가 생겨 커피가 안나오는데 나보다 한발 먼저 커피를 내려 가던 키가 190은 넘고 얼굴도 배우 뺨치는 훈남 청년이 도와주려고 다가 와서 해보다 잘 안된다고 멋쩍어하더니 직원까지 불러 기어코 한잔 만들었는데 와아.. 캡슐커피까지도 바리스타가 만든 만든 거 이상으로 맛있다. 여긴 커피가 왜 이리 맛있지? 이런 맛 때문에 커피가 전세계로 퍼졌겠지? 그런데 왜 우리나라에서는 5000원짜리 커피도 맛이 없을까? 집에서 핸드드립으로 마시기 시작한 이후 우리는 별다방이든 콩다방이든 커피가 맛있어서 마신적은 없는 것 같았는데 스페인 와서 보니 비로소 사먹는 커피도 맛있다는 걸 알았다. 그것도 1유로짜리가.
아침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내려가니 창문 밖이 바로 경기장이었다. 신랑이 그렇게 들어가보고 싶어하던 경기장을 배경으로 맛있는 아침식사를 했다.
자동차 전용도로 다리 아래 공간에서 인공 암벽 등반하는 이들
유람선이 다니는 과달끼비르강 야경
호텔 조식당의 창너머 풍경
김태희가 빨간 드레스를 입고 플라멩코를 추던 광고가 있었다. 그것을 촬영한 장소가 바로 세비야 스페인 광장이라고 한다. 김태희도, 빨간드레스도, 그녀가 추는 춤도 예뻤지만 그 춤을 추는 장소가 왜 하필 세비야인가 늘 궁금했었다.
광장에 팬 플룻과 색소폰 연주 음악이 울려 퍼졌다. '엘 콘도 파사' 가락이 아침 공기와 이곳의 이국적인 풍경과 잘 어울린다.
스페인 여행 전체를 통털어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이 이 스페인광장이다. 커다란 장방형 부지의 반이 반원형 광장이고, 광장의 지름이자 건너편 공원과 경계를 이루는 길을 중심으로 건너는 숲, 이쪽은 광장이다. 광장 가운데는 분수대가 있고 가장자리를 따라 성당, 왕궁, 미술관으로 쓰인 반원형 건물이 있는데 아름답고 놀랍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만큼.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바다를 통해 세계를 지배하다시피 하던 스페인 황금시대의 주무대는 세비야였다. 아직 기차가 없던 시대 운송 수단은 주로 배였기 때문에 과달끼비르강을 끼고 있는 세비야는 세계로 통하는 바다와 수도인 마드리드가 있는 내륙을 이어주는 물류의 중심지였다. 이런 지리적인 조건으로 당시 세비야가 얼마나 얼마나 번성했고 또 스페인의 국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완벽한 건축물이다. 반원형의 높지 않은 건물, 광장과 건물을 이어주는 원형 계단, 긴 회랑과 아치형의 회랑 처마, 기둥들, 회랑의 난간, 종탑, 창틀과 벽면, 기둥이나 모서리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들, 타일 장식들은 하나만 떼어 놓아도 예술, 모아 놓아도 예술 그 자체이다.
너무 커서 한 프레임에 다 담을 수가 없어 사진을 찍어놓고 보니 감동이 반 이하로 줄어 아쉽다.
아래 사진은 아쉬우나마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잘라서 찍은 사진이다.
계단 난간이 도자기로 되어 있다.
스페인광장 입구 반대쪽은 이렇게 공원이고
공원입구에서 길건너 스페인 광장 건물을 배경으로
대항해 시대의 중심임을 상징하는 콜럼부스의 배가 높이 떠 있는 공원
11시에 세비야 대성당 입장이 된다하여 성당으로 가는 길에 '세비야의 이발사(그 땐 세빌리야의 이발소로 배웠지만)' 배경이 된 이발소 앞을 지났다. 이슬람 시대에 요새(카스바)도 보고 구 시가지 골목도 걸었다. 유대인 골목을 지날 때 느끼하게 생긴 전형적인 스페인 남자 둘이 기타와 만돌린을 연주하며 우리를 따라왔다. 그들이 연주하고 노래하는 베사메무초는 여행자의 기분과 거리의 풍경에 꼭 맞는 즐거움을 선사하였고 나는 그 값으로 5유로를 지불했다. 사진을 찍고 노래를 같이 들은 서울 아줌마들이 " 어머 돈 달래, 2유로 달라네."하며 자기들끼리 수군대더니 피해 간다. 스페인광장에서도 팬를룻 연주하는 사람들 앞에 가서 그들을 배경으로 V자를 그리며 사진 찍고 음악 듣고 다 하고선 그냥 가 버려 참 민망했는데 우리나라 여행자들 이런 문화를 즐기는 매너를 배웠으면 좋겠다.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커피나 맥주처럼 음악을 팔 뿐이고 그것이 커피나 맥주처럼 내 여행의 즐거움이 되었다면 값을 치르는 것. 음악도 춤도 공연도 공짜가 아니고 그들도 밥 먹고 옷 입어야 산다는 것을 이해하기를... 꼬르도바에서 거리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젊은 여성의 연주가 좋아 듣고 나서 10유로짜리 시디를 한장 사려고 고르니까 돈이 꽤 있는 것 같은 서울 아줌마가
" 에이 그거 다 인터넷에서 다운받을 수 있어요."
하고 큰소리로 말해서 우리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없기를 간절히 바랬었다. 가는 곳마다 쇼핑에 쓰는 돈 1%만이라도 이런 곳에 쓰면 좋겠다.
캐나다의 레벨스톡이나 호주의 오메오 같은 산골 소읍에 마을 오케스트라가 존재 할 수 있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
이슬람의 흔적 카스바
롯시니의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 배경이 된 이발소
구시가지의 유대인 거주지
세비야대성당은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진짜 가치는 세계에서 3번째이고 스페인에서 제일 크다는 규모 보다도 이슬람 사원의 첨탑을 허물지 않고그 위에 기독교 탑을 세워서 외관에 이슬람 사원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스페인 기독교의 심장인 대성당 창문이 이슬람 사원이나 궁전에서 볼 수 있는 촛불모양이라는 것에서 스페인 문화의 매력을 엿볼 수 있었다. 통 큰 배짱, 유럽의 변방이면서도 기죽지 않는 긍정 에너지, 그것은 포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이미 그 땅을 800년 가까이나 지배당한 역사를 부정하지 않고 그 시간조차 자신들의 역사로 받아들이는 대범함 같은 것. 그래서 아마 몇번이나 성당 건축을 봐 왔는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고 보는 것마다 매력적이었던가 싶다.
스페인이 가장 강하고 부유했던 시대의 중심지였던 세비야라 그런지 성당에는 금은 보석으로 만든 왕관이나 장신구 같은 화려하고 값진 보물이 전시되어 있었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콜럼버스의 묘로 쏠린다. 신대륙을 발견하였으나 금을 찾지 못하고 그곳이 인도가 아니었고 열렬한 후원자인 이사벨라 여왕이 죽자 페르디난드왕은 방관자 또는 방해자로 변하며 입지가 어려워진 콜럼버스는 다시 탐험을 떠나 바야돌리드에서 사망한다. 생전에 다시는 스페인 땅에 발을 딛지 않겠다한 그의 시신은 히스파니올라(지금의 도미니카)의 산토도밍고 대성당으로 옮겨졌다가 쿠바의 아바나에 안장된다. 사후 수세기가 지난 1898년 이곳 세비야로 유해를 옮겼지만 땅에 발을 딛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를 받들어 공중에 떠 있는 형태의 묘지(관)를 만들고 그것을 스페인의 네 왕이 떠받들고 있다. 앞에 선 두 왕은 콜럼버스를 지지하고 지원해 스페인을 부국으로 만드는데 이바지한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여왕처럼 역사 앞에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왕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그리고 뒤에서 고개 숙이고 관을 메고 서 있는 두 왕은 이사벨라 여왕의 남편이지만 그녀와는 달리 좀 소심했던 것 같은 아라곤의 왕 페르디난드 처럼 콜럼버스를 외면하거나 방해한 왕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놓았다. 죽어서는 네명의 왕이 받드는 콜럼버스가 스페인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알 것 같았다.
성당에서 나오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중국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자 비는 바람과 함께 폭우로 변했다. 한국 식당이 별로 없어서 그런 선택을 했나본데 차라리 현지 음식을 좀더 자주 먹으면 좋겠다. 남편은 자꾸 중국 식당 가니까 오히려 짜장면이나 짬뽕 한그릇 딱 먹었으면 좋겠다 한다. 아쉽긴 해도 난 오늘도 잘 먹었다.
폭우 속에서 스페인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포르투갈로 가기 위해 버스가 출발했다.
너무 아름답고 위대해서 부술 수 없었던 이슬람 사원 건물과 뒤편의 탑
세비야대성당의 정식명칭 캐터드럴 히랄다
아래 사진 몇장은 탑의 모습, 이슬람의 탑을 부수지 않고 그 위에 종탑을 올렸다. 창틀을 보면 아래는 촛볼 모양이고 위는 아치 또는 장방형이다.
컬럼버스의 묘
보석실에 전시된 왕관과 장신구들
적어도 800년 이상 된 성문, 이슬람 문양과 촛불모양 아치으로 1358년 이슬람이 이곳을 떠나기 전에 건축된 것이란 뜻이다.
전차와 마차가 공준하는 거리
천년도시에도 오늘의 생활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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