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천으로 물을 보태는 무릉천의 구부정한 삼십리길을 따라 가다보면 벼락 같이 땅이 솟구쳐 병풍을 친 풍경이 시선을 압도한다. 그 병풍은 반원형의
부챗살로 퍼져 있는데 표고차가 800미터쯤 된다. 그냥 단순한 부챗살이 아니라 용틀임 친 바위봉우리들이 있고 그 바위 봉우리 아래에는 환선굴,
관음굴, 사다리바위바람굴 등 수많은 동굴들마저 품은 범상치 않은 부챗살이다. 병풍이 바로 덕항산이고 덕항산이 수백길 낭떠러지로 내려 앉은 곳이
골말이다.
삼척 사람들은 해방 무렵까지 이골짜기 안에 사람이 사는 것조차 몰랐다. 오죽했으면 6.25가 일어난 줄도 모르고 살았을까?
한때 이 골말 사람들은 무릉도원이 있다고 믿어왔고 그 대상으로 환선굴을 지명한다. 환선굴에서는 사시사철 일정량의 물이 쏟아져 내려오고, 그 물줄기에 봄이년 진달래 꽃잎이나 복숭아 꽃잎이, 가을이면 배춧잎이 떠내려 왔다고 한다. 환선굴 깊은 속 어딘가에 등 따시고 배부른 태평세월이 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했으리라. 그러나 조금만 과학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무릉도원이 있다는 것은 싱거운 상상에 불과하다.석회암이 녹아서 만들어진 동굴이 얽혀있고 그 동굴의 끝 한자락이 서쪽의 광동댐 이주단지 배추밭 언저리에 닿아 있어서 진달래 꽃잎이며 배춧잎들이 그 물길에 쓸려 들어간 것이다. 지금도 광동댐 이주 단지가 있는 귀네미골은 비가 와도 금새 물이 마른다.
어쨋거나 옛 골말 사람들은 환선굴 위쪽의 자암재가 십승지로 가는 길목이라 여겼다. 자암재를 오르면서 뒤돌아본 덕항산 골말의 깊은 골짜기 여기저기에서 솟아오른 병풍바위며 설패바위와 그 사이를 감싸고 도는 운무를 보고 있노라면 21세기에도 지금 가는 길 끝에 정말 무릉도원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어떤 산악인은 이 골짜기 안에 있는 바위들이 거진 촛대의 모양을 하고 있어 능선에 올라 내려다보면 발아래 깊은 골짜기가 음습하지 않고 수만개의 춧불을 켜 놓은 듯 환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그런데 골말 사람들은 촛대봉을 좃대봉이라 불르는데 환선굴을 비롯한 수많은 동굴과 음양의 조화를 이룬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자연의 오묘한 조화 속에서 이 골짜기 안에서는 산삼이 자라고 (요즘은 거의가 재배한 장뇌삼이지만) 그러고 보니 어찌 길지가 아니겠는가?
덕항산은 동쪽과 서쪽이 너무나 다른 얼굴을 한 야누스이다.
동쪽은 석회암지대를 흐르는 물이 깊게깊게 파 놓은 협곡인데 비하여 서쪽은 어릴 적 소 꼴 먹이러 왔던 마을 앞산처럼 부드럽고 포근한 언덕이다.
이 언덕에 삼척시 하장면에 광동댐을 만들면서 이주단지가 생기고 그들이 산허리를 배추밭으로 일구었는데 삼년에 한번만 제대로 되어도 돈을 갈퀴로 긁는다니 세상을 물욕으로만 보자면야 이곳이 바로 십승지가 아니겠는가?
그러고보면 자암재가 십승지로 가는 길목이란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자암재에서 덕항산 정상을 지나 구부시령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은 야누스의 양면을 감상하면서 갈 수 있는 능선길이다. 동쪽을 내려다 보면 발아래 무엇이 있는지도 모를 까마득한 벼랑이고 그 벼랑에 선 나무들은 연신 추락하며 영양실조 걸린 삭정이 같은 몸을 바람에 내맡긴 채 아우성이라면 서쪽은 평평하고 완만한 산등성이고 이곳의 나무들은 씨알 굵은 원시림이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모순을 고스란히 안고 백두대간을 이어가는 능선은 이 골짜기에 발붙이고 살아온 어느 노인의 굽은 등줄기처럼 마냥 이어질 뿐 딱히 정상이랄 곳도 없다.
덕항산에서 자암재의 반대쪽으로 구부시령(九夫侍嶺)이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삼척사람들이 태백으로 소금을 지고 오르내리던 이 고개에 주막이 있었는데 이 주막의 주인인 여자가 서방을 맞아들이기만 하면 죽고 또 새롭게 맞아들이면 죽고 하여 아홉의 서방을 맞아들였다고 한다. 아홉의 서방을 모시고 과부가 살던 고개라 하여 구부시령이 되었다고 하나 어떤 산악인이 해석하기를 그 과부가 사람을 잡아먹는 불여우나 남자를 호리는 요부를 말하는 게 아니라 고개가 하도 높고 험해서 서방 아홉을 모시고 사는 것 만큼이나 힘들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해석을 하는데 대이리 옆골짜기인 대기리에서 오르는 가파른 길을 오르다 보면 그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한다.
환선굴은 성류굴이나 노동굴 같은 오밀조밀한 종유동굴과는 전혀 다르다. 만장굴의 규모와 석회동굴의 아기자기함을 합쳐 놓은 모습이랄까... 습기차고 답답한 동굴을 싫어하는데 환선굴은 널찍하고 호쾌하고 그러면서 지루하지가 않아 서너번을 가도 그때마다 재미있기는 했다. 언제나 사람들이 붐비어 좀 아쉽기는 하지만....
덕항산 서쪽 자락 외나무골에는 30년 전쯤에 어느 외국인 신부가 세웠다는 예수원이 있는데 20대 후반 이 예수원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읽고 이곳을 찾아 왔는데 차를 도대체 몇번이나 갈아타야 하는지 지치고 지쳐서 태백에 도착했지만 정작 태백 사람들도 예수원을 아는 사람이 없어 그냥 삼척으로 나가고 말았던 적이 있다. 대간꾼들이나 단체 등반을 온 사람들은 대개 이곳으로 해서 덕항산을 올라 골말로 내려 가거나 광동댐 이주단지쪽으로 내려간다.
안타깝게도 골말은 더 이상 오지가 아니다. 태백이나 삼척 인근에 가면 도로위에 걸린 이정표에 환선굴 안 적힌 곳이 없고 성수시 비수기 할 것없이 평일에도 관광버스들이 구름같은 사람들을 내려 놓아 언제나 왁짜지껄한 곳, 지나치게 비싼 입장료와 주차료와 관광객들을 상대로 장사하면서 이미 오지 사람의 얼굴을 벗어버린 골말 사람들, 조앤님이 어디선가 찾아 이곳에 올리셨던 사진처럼 아릿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굴피집도 너와집도 동동주나 파전 따위를 파는 그저 그런 저잣거리 집이 되어비린지 오래,,, 덕분에 신기역에 내려서 골말로 들어가는 버스편이 없어 그냥 돌아 갈 수밖에 없던 안타까움은 겪지 않아도 되는 것을 위안으로 여겨야 하리.
골말에서 환선굴로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길 바닥에도 눈길 주지말고 아무데서나 웃고 떠드는 단체 관광객등에도 눈길 주지 말고 위로 솟구친 병풍같은 덕항산을 보며 오르다 촛대봉인지 좃대봉인지 수도없이 솟아있는 바위봉우리들에게 이야기 건네며 걷다보면 마음은 또 하나의 무릉을 걷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삼척 사람들은 해방 무렵까지 이골짜기 안에 사람이 사는 것조차 몰랐다. 오죽했으면 6.25가 일어난 줄도 모르고 살았을까?
한때 이 골말 사람들은 무릉도원이 있다고 믿어왔고 그 대상으로 환선굴을 지명한다. 환선굴에서는 사시사철 일정량의 물이 쏟아져 내려오고, 그 물줄기에 봄이년 진달래 꽃잎이나 복숭아 꽃잎이, 가을이면 배춧잎이 떠내려 왔다고 한다. 환선굴 깊은 속 어딘가에 등 따시고 배부른 태평세월이 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했으리라. 그러나 조금만 과학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무릉도원이 있다는 것은 싱거운 상상에 불과하다.석회암이 녹아서 만들어진 동굴이 얽혀있고 그 동굴의 끝 한자락이 서쪽의 광동댐 이주단지 배추밭 언저리에 닿아 있어서 진달래 꽃잎이며 배춧잎들이 그 물길에 쓸려 들어간 것이다. 지금도 광동댐 이주 단지가 있는 귀네미골은 비가 와도 금새 물이 마른다.
어쨋거나 옛 골말 사람들은 환선굴 위쪽의 자암재가 십승지로 가는 길목이라 여겼다. 자암재를 오르면서 뒤돌아본 덕항산 골말의 깊은 골짜기 여기저기에서 솟아오른 병풍바위며 설패바위와 그 사이를 감싸고 도는 운무를 보고 있노라면 21세기에도 지금 가는 길 끝에 정말 무릉도원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어떤 산악인은 이 골짜기 안에 있는 바위들이 거진 촛대의 모양을 하고 있어 능선에 올라 내려다보면 발아래 깊은 골짜기가 음습하지 않고 수만개의 춧불을 켜 놓은 듯 환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그런데 골말 사람들은 촛대봉을 좃대봉이라 불르는데 환선굴을 비롯한 수많은 동굴과 음양의 조화를 이룬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자연의 오묘한 조화 속에서 이 골짜기 안에서는 산삼이 자라고 (요즘은 거의가 재배한 장뇌삼이지만) 그러고 보니 어찌 길지가 아니겠는가?
덕항산은 동쪽과 서쪽이 너무나 다른 얼굴을 한 야누스이다.
동쪽은 석회암지대를 흐르는 물이 깊게깊게 파 놓은 협곡인데 비하여 서쪽은 어릴 적 소 꼴 먹이러 왔던 마을 앞산처럼 부드럽고 포근한 언덕이다.
이 언덕에 삼척시 하장면에 광동댐을 만들면서 이주단지가 생기고 그들이 산허리를 배추밭으로 일구었는데 삼년에 한번만 제대로 되어도 돈을 갈퀴로 긁는다니 세상을 물욕으로만 보자면야 이곳이 바로 십승지가 아니겠는가?
그러고보면 자암재가 십승지로 가는 길목이란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자암재에서 덕항산 정상을 지나 구부시령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은 야누스의 양면을 감상하면서 갈 수 있는 능선길이다. 동쪽을 내려다 보면 발아래 무엇이 있는지도 모를 까마득한 벼랑이고 그 벼랑에 선 나무들은 연신 추락하며 영양실조 걸린 삭정이 같은 몸을 바람에 내맡긴 채 아우성이라면 서쪽은 평평하고 완만한 산등성이고 이곳의 나무들은 씨알 굵은 원시림이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모순을 고스란히 안고 백두대간을 이어가는 능선은 이 골짜기에 발붙이고 살아온 어느 노인의 굽은 등줄기처럼 마냥 이어질 뿐 딱히 정상이랄 곳도 없다.
덕항산에서 자암재의 반대쪽으로 구부시령(九夫侍嶺)이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삼척사람들이 태백으로 소금을 지고 오르내리던 이 고개에 주막이 있었는데 이 주막의 주인인 여자가 서방을 맞아들이기만 하면 죽고 또 새롭게 맞아들이면 죽고 하여 아홉의 서방을 맞아들였다고 한다. 아홉의 서방을 모시고 과부가 살던 고개라 하여 구부시령이 되었다고 하나 어떤 산악인이 해석하기를 그 과부가 사람을 잡아먹는 불여우나 남자를 호리는 요부를 말하는 게 아니라 고개가 하도 높고 험해서 서방 아홉을 모시고 사는 것 만큼이나 힘들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해석을 하는데 대이리 옆골짜기인 대기리에서 오르는 가파른 길을 오르다 보면 그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한다.
환선굴은 성류굴이나 노동굴 같은 오밀조밀한 종유동굴과는 전혀 다르다. 만장굴의 규모와 석회동굴의 아기자기함을 합쳐 놓은 모습이랄까... 습기차고 답답한 동굴을 싫어하는데 환선굴은 널찍하고 호쾌하고 그러면서 지루하지가 않아 서너번을 가도 그때마다 재미있기는 했다. 언제나 사람들이 붐비어 좀 아쉽기는 하지만....
덕항산 서쪽 자락 외나무골에는 30년 전쯤에 어느 외국인 신부가 세웠다는 예수원이 있는데 20대 후반 이 예수원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읽고 이곳을 찾아 왔는데 차를 도대체 몇번이나 갈아타야 하는지 지치고 지쳐서 태백에 도착했지만 정작 태백 사람들도 예수원을 아는 사람이 없어 그냥 삼척으로 나가고 말았던 적이 있다. 대간꾼들이나 단체 등반을 온 사람들은 대개 이곳으로 해서 덕항산을 올라 골말로 내려 가거나 광동댐 이주단지쪽으로 내려간다.
안타깝게도 골말은 더 이상 오지가 아니다. 태백이나 삼척 인근에 가면 도로위에 걸린 이정표에 환선굴 안 적힌 곳이 없고 성수시 비수기 할 것없이 평일에도 관광버스들이 구름같은 사람들을 내려 놓아 언제나 왁짜지껄한 곳, 지나치게 비싼 입장료와 주차료와 관광객들을 상대로 장사하면서 이미 오지 사람의 얼굴을 벗어버린 골말 사람들, 조앤님이 어디선가 찾아 이곳에 올리셨던 사진처럼 아릿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굴피집도 너와집도 동동주나 파전 따위를 파는 그저 그런 저잣거리 집이 되어비린지 오래,,, 덕분에 신기역에 내려서 골말로 들어가는 버스편이 없어 그냥 돌아 갈 수밖에 없던 안타까움은 겪지 않아도 되는 것을 위안으로 여겨야 하리.
골말에서 환선굴로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길 바닥에도 눈길 주지말고 아무데서나 웃고 떠드는 단체 관광객등에도 눈길 주지 말고 위로 솟구친 병풍같은 덕항산을 보며 오르다 촛대봉인지 좃대봉인지 수도없이 솟아있는 바위봉우리들에게 이야기 건네며 걷다보면 마음은 또 하나의 무릉을 걷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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