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태백산맥을 본 사람은 혹 이 장면을 기억할지 모르겠다.
배우 이혜영이 상반신을 완전히 노출하여 화제가 되었던 장면인데
영화속에서는 달궁계곡을 지나던 빨치산 부대가 잠시 행군을 멈추고 부대원전체가 계곡에 들어가 목욕을 한다.
그런데 이 계곡은 실제로 지리산달궁계곡이 아니라 바로 보경사를 품고 있는 내연산 폭포골이다.
해발 1000미터도 안되는 산들이 품은 계곡치고는 으리으리하다 해야 할 정도로 거창한 열두폭포를 거느린 계곡이다.
산행은 천년고찰 보경사에서부터 시작한다.
절 오른쪽 돌담을 따라 돌층계를 오르면 고려의 고승 원진국사 부도가 있다.
여기서 한동안은 좀 가파른 소나무숲길. 30분 가량 땀흘리면 넓어진 길과 만나 완만한 숲길이 이어진다.
보경사 목탁소리와 산새소리의 화음 속에, 멀리 중산리 마을을 곁눈질하며 울창한 잡목터널로 들어서는 기분이 상쾌하다.
정상쪽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지나 쾌적한 숲길을 즐기다보면 오른쪽에 쫄쫄 흘러내리는 문수샘.
목을 축이고 낙엽 푹신한 산굽이를 몇차례 돌아가면 바위너덜지대다.
갈림길이 나오지만 곧 다시 만난다.
능선은 부드럽고 숲은 빽빽한 훌륭한 산책길이다.
오른쪽 멀리 동해바다를 볼 수 있다지만, 숲에 가려 잡히지 않는다.
수리더미코스·조피등코스 등 골짜기로 내려가는 갈림길을 지나면 평탄한 소나무숲 네거리가 나온다.
직진 방향 두 산길은 다시 만난다.
거무나리코스 팻말을 지나 좀더 오르면 내연산 정상인 삼지봉이다.
1시간30분 가량 더 가면 내연산의 최고봉인 향로봉(930m).
향로봉으로 해서 시명리로 내려갈 수도 있고, 더 멀리는 삼거리와 삿갓봉까지 등산로가 이어진다.
골짜기로 내려가는 길은 복잡다단하다.
수없는 갈림길에다 이정표마저 없어 길을 잃고 헤매기 쉽다.
길고 험한 거무나리코스보다는 앞서의 조피등코스를 타는 게 낫다.
두 길은 결국 만나, 다섯번째 폭포인 은폭포 아래쪽으로 내려오게 된다.
수십길 벼랑 사이로 이어지는 폭포들
높이 7~8m의 은폭포는 여기서 200여m 위 바위틈에 걸려 있다.
더 위쪽으로 복호1~2폭포·실폭포·시명폭포가 있다. 수량이 꽤 많고 깨끗하다.
1970년대까지 20가구가 살았다는 이 골짜기에 지금은 오염원이 없다.
다슬기들이 깔린 맑은 물에 피라미·갈겨니들이 노닌다.
물을 건너 내려가면서 바윗덩어리들은 점차 커져 간다.
갑자기 물소리가 거세지고, 탁 트인 골짜기 너머로 거대한 암벽이 보인다.
12폭포 중에서 가장 절경을 이루고있는 연산폭포의 꼭대기다.
길을 따라 바위벼랑을 내려가면 또다른 폭포들이 펼쳐진다.
관음폭포와 무풍폭포다.
계곡을 둘러싼 까마득한 절벽과 웅장한 바위들, 물살에 팬 커다란 동굴들로 탄성이 절로 나온다.
관음폭포 위에 걸린 쇠다리를 건너 연산폭포 밑까지 갈 수 있다.
국내 어느 계곡에 견줘도 뒤지지 않을 호쾌한 자태다.
연암벽 등반대회가 열리기도 하는 곳이다.
여기서부터 하류로 잠룡폭·삼보폭·보현폭·쌍생폭 등 크고작은 폭포들이 이어진다.
길은 평탄한 내리막길. 내려오면서 보현암·문수암·서운암 등 작은 암자들을 만난다.
다 내려오면 보경사 왼쪽 돌담이다.
산행길은 반대로 해도 좋다. 아니 십중 팔구는 반대로 하게 될 것이다.
보경사 매표소를 지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폭포 계곡으로 들어서게끔 길이 나있다.
그래서 입구에서 연산폭포까지는 사람으로 넘쳐나지만 능선이나 연산폭포 위 은폭부터는 거의 무인지경이다.
등산 전에 매표소에서 등산로 지도를 챙겨가는 게 좋다.
보경사에서 연산폭포까지는 2.7㎞, 왕복 2시간.
내연산 보경사는 신라 진평왕 25년(603년) 지명법사가 지었다는 절이다.
지명법사가 진나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올 때 가져온 8면보경을 내연산 아래 큰 못에 묻고 보경사를 세웠다고 한다.
보물인 원진국사비와 원진국사부도(이상 고려 고종 때 조성) 외에 신라 때 지어 조선 숙종 때 중건한 건물인 적광전,
고려시대 세워진 5층석탑(금당탑), 800년 된 회화나무 등이 볼거리다.
400년 되었다는 탱자나무가 여느 탱자 울타리와는 사뭇 다른 자태로
노란 탱자를 주렁주렁 달고 절마당 한켠 담장 옆에 두그루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면
슬며시 웃음이 입가에 걸린다.
조선 숙종의 친필각판도 보관돼 있다.
보경사엔 스스로 호랑이의 밥이 되어 입적했다는, 고려 중기 고승 원진국사의 최후에 얽힌 얘기가 전해진다.
온산이 눈으로 덮인 겨울, 원진국사가 수도 중인 보경사 안으로 굶주린 호랑이가 들어왔다고 한다.
호랑이가 배가 고파 대웅전 앞에서 울부짖자 원진국사는 육신을 호랑이의 허기를 달래는 데 바치기로 하고,
대웅전 마당으로 내려서 스스로 ‘호식’이 됐다는 것이다.
국사의 몸은 경내에서, 머리는 산 중턱에서 발견됐다.
뒤에 몸이 있던 자리에는 ‘원진국사비’를, 머리가 있던 곳엔 사리를 봉안한 부도를 세웠다고 한다.
이 때문에 비석을 받친 거북상도 몸은 거북으로, 머리는 여의주를 문 용의 모습으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동동주 한잔에 부지깽이 나물 안주면 더할 나위가 없다.
미리 볶아놓은 나물을 다시 한번 참기름에 무쳐 내놓아 고소한 냄새가 시장끼를 확 돌게 한다.
일주문 바로 앞에 있는 연산온천 파크텔은 작은 호텔이지만 깔끔하고 기품이 있다.
산행 후 피로와 땀을 씻어내기에 알맞은 이곳 사우나, 이름난 온천은 아니지만
수질은 국내 온천 중에서 최상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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