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에 두어번 씩은 함께 산행이든 여행이든 하던 친구들이 하나씩 둘씩 고3 학부모라는 시간을 거치면서 여름이나 겨울방학에 좀 멀리로 다니던 것 외엔 여행 나들이가 뜸했었는데 이제 딱 한 명 만 고등학교 학부모로 남아 있어서 다시 시간을 내어서 다니자고 하고 첫 번 째 간 곳이 봉화 승부역과 양원역 사이의 세평 하늘길이다.
20년 더 전 이곳에 처음 갔을 때는 기차로만 갈 수 있는 곳이었다. 20년전 쯤에 석포쪽에서 승부로 들어가는 찻길이 열렸다. 협곡을 따라 흐르는 강가의 옹색하고 좁은 터를 겨우 비집고 만든 길이라 맞은 편에서 차가 오면 한참 후진과 전진을 하며 비켜가야 했던 그 길도 이젠 불편없이 차들이 다니는 시멘트 포장길이 되었고,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겨우 발견할 수 있었던 양원역 인근 전곡 원곡 마을도 광회리 쪽에서 산을 넘어 도로가 뚫린 지 오래 되었지만 여전히 차보다는 기차로 접근이 쉬운 곳이다.
V-train, O-train 같은 관광열차가 유명세를 타면서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기사에 심심찮게 나오면서 5-6년 전 오지마을 사람들과 철길을 따라 트레킹하면서 들렀던 때의 그 무인지경 산골이 이제는 휴일이면 작은 장터가 생기고 걷는 내내 다름 팀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길을 내주면서 걸어야 할만큼 사람들이 많았다.
시간에 매이는 것도 좀은 불편하고 무엇보다 당연히 표가 있을 줄 알았는데 매진이라는 말이 이 코스에서만큼은 생소한 정규 기차편, 그리고 5분만 타도 새마을호 특실 최소구간 요금을 적용한다는 8,400원짜리 V-train, O-train을 두고 고민하다 차를 가지고 양원으로 가기로 마음 먹었다. 여행에서만큼은 내 의견을 100% 믿고 따르는 일행에게는 물어보지 않아도 되었고.
한글날 휴일 아침, 시민회관 주차장에서 만나 출발, 원두커피 드립용품과 샌드위치, 사과 몇 알 그리고 튼튼한 신발,,,
사실 아침엔 동쪽으로, 돌아올 때는 서쪽으로 달려야 하는 이 코스는 드라이브길로는 별로다. 하지만 아직은 푸르름이 짱짱한 숲에 언뜻언뜻 붉고 노란 기운이 스며들고 있고 무엇보다 길가의 황금색 벼 논이 눈이 부셨다.
광회에서 국도를 버리고 그 너머에 마을이 있을 것 같지 않은 방향으로 난 산길로 접어들었다. 가파른 고개를 넘어 내려가자 눈앞이 툭 트이면서 갑자기 마을과 강이 나타났다.
갈림길에서 마을 할아버지에게 역으로 가는 길과 주차여부를 물어보는데 천천히 걸어오셔서 자세히 설명해 주신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이 따뜻해졌다.
역 근처 소나무 아래 마지막 남은 한자리에 주차를 하고 보니 기차 시간이 30분 정도 남아서 커피를 드립해서 샌드위치에 곁드려 요기를 했다. 질 좋은 원두로 뽑은 커피향은 산골 역의 싸늘한 아침기운과 함께 천상의 맛을 제공해 주었다.
산골 아침 식사를 끝내고 때맞춰 도착한 기차에 올랐다. 승무원을 찾아 요금을 결제해야하는 무인역이라 승무원을 찾는데 그전에 벌써 승부역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오래 전에 같이 근무했던 친구를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일행들은 이곳에 오래 살아서 아는 사람이 많아 여기저기 인사를 나누고 더러는 간식도 나누어 줘서 받고 보니 넘치게 많았다.
승부역에서 내려 걷기 시작, 예전에 왔을 때는 바로 앞에 보이는 다리(철교)를 건너 터널로 진입하여 철길을 따라 걸었는데 철길을 우회하는 강을 따라 트레일이 정비되어 있었다. 이른 가을 아침 정태춘의 "북한강에서"라는 노래가 딱 어울릴만한 분위기의 길을 걸었다. 강물은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고 협곡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햇살은 맑고 청량한 공기 속에서 가로막힘없이 촤라락 소리를 내듯이 곧장 떨어져 내렸다. 느리게 걸으며 이야기하고 걷다가 앉기 좋은 곳이 나타나면 앉아서 이야기하고, 주위의 산이나 나무나 사람이 심심해서 졸기라도 할까 봐 기차가 우르르 소리를 내면서 달려왔다가 사라지고 함께 하는 모든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예전에 이곳을 걷다 터널을 다 빠져나오기 전에 빠앙 하고 기차가 달려와서 혼비백산하여 전력질주로 터널을 가까스로 빠져나와 가슴을 쓸어내렸던 이야기, 그 때는 길에 제대로 없어 아슬아슬한 바위벼랑 중간으로 난 토끼나 다님직한 길로 떨면서 지나갔던 이야기, 그리고 또 이야기, 이야기 들.....
한 번 터널에서 혼이나 다른 사람들은 절벽으로 가로질러 건너고 여련화 언니만 용감하게 걸어갔던 짧은 터널과 다리를 우회하느라 가파른 계단을 만들어 산을 넘도록 만든 구간만 유일하게 숨찬 길이었고 나머지는 내내 평탄한 루트였다.
6.6킬로의 짧은 코스를 거의 네시간에 걸쳐서 걷고 양원역에 도착하니 작은 장터가 열려 있었다. 유명한 양원역 돼지껍데기 두 접시와 동동주 두 잔을 시켰다가 너무 맛있어 다시 두 접시와 두 잔을 추가하여 맛있다를 연발하면서 먹었다. 말도 이쁘게 하는 젊은 농부가 보는 사람을 기분좋게 하였다.
거기 장터에서 산나물, 땅콩, 호박 , 고추 같은 것을 사고 자동차로 들어간 길을 되짚어 나오다 광회분교에 들렀다. 정말 작고 아담한 학교가 풀포기 하나까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어 근무하는 사람의 성향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현동의 매운탕 집에서 지인이 추천해 준 잡고기 매운탕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얼큰하고 깔끔한 매운탕과 맛깔스런 밑반찬이 역시 추천해준 지인의 안목은 믿어도 된다는 확인을 하고 짧은 가을 나들이를 마무리했다.
승부역 앞의 맑은 강(낙동강)
승부역 앞의 트레일 안내 이정표1
가을 햇빛에 반짝이는 계곡
딱 한번 강을 건너는 다리
길가의 곤드레(고려엉겅퀴)밭
지나가는 오 트레인 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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