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만난 이야기/해외여행기

동유럽 여행기(출발, 프라하와 폴란드)

목인 2010. 8. 20. 16:08

출발 그리고 프라하의 밤

8월 9일 12시 30분 설레는 마음으로 모든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를 탑승하였다.

인천에서 동유럽의 관문인 프라하 루친공항까지는 10시간이 걸린다는데 중국쪽 항로가 붐벼서 2시간 후 에나 출발한다는 것이었다.

그나마도 더 기다린 후 4시쯤에출발, 결국 13시간 비행을 한 셈이다.

체코의 첫 인상은 ‘조용하고 차분하고 평평한 땅'이었다.

현지시각 오후 7시 50분, 시차는 7시간,

프라하 시내 한국식당으로 이동하는데

창밖으로 고풍스러운 건물들과 창문에 예쁜 화분들이 걸린 샬레형 집들 뒤로 붉은 해가 지고 있었다.   

나는 여행 체질이라 그런지 처음 먹어보는 현지 음식도 잘 먹고 아무데서나 잘 자고 시차 영향도 별로 안 받는 편이다.

그래서 현지에서 한국식당 간다하면 다른 이들은 다 함성을 지르는데 나는 늘 실망을 한다.

프라하의 한국식당도 역시 그저 그랬다.

원래 체코에서 두번째 큰 도시인 브루노에서 잘 예정이었는데 너무 늦어 프라하 코렌치아 호텔에서 첫 밤을 보냈다.

 

 프라하 루친 공항. 저녁노을이 내리고 있었다.

 호텔 창으로 본 여명의 프라하 시내. 일출 사진을 찍었으나 창문이 열리지 않아 반사된 영상으로 사진 이 안좋았다.


폴란드 

폴란드(Poland)는 '폴족의 땅' 또는 평지로 된 나라이다.( 'Pol'이 '평평한'이란 뜻이 있으므로)

폴란드는 남한의 4배 정도지만 90% 평지에 10%만이 산악이므로 경작 등 실제 가용 면적은 남한의 15배 정도로 국토가 넓은 나라이다.

어제 브루노까지 가야했는데 프라하에서 머문 터라 실제 여행 첫날인 오늘은 이동거리가 무척 길었다.

호텔 아침 식사는 과일이 많고 치즈나 햄이 무척 짰다.

오전 내내 버스는 거의 평지로 된 고속도로를 달렸고

창 밖 풍경은 삼나무, 자작나무, 가문비나무가 빽빽한 낮은 구릉과 빨간 지붕의 예쁜 집,

그리고 밀과 옥수수가 수확기에 이른 들이었다.

오전 내내 달려 국경이 가까운 오스트라바의 한국식당에서 점심으로 육개장을 먹었다.

식당 옆 소박한 현지인 집 마당에 놓인 작은 테이블과 잘 가꾸어진 잔디 마당이 예뻐서 담장 안을 자꾸 기웃거렸다.

점심을 먹고 또 달리고 달려 프라하를 출발한지 7시간이 넘어 오후 2시 쯤 오시비엥침에 도착했다.

독일인들이 아우슈비츠란 이름으로 수용소를 세우고 100만이 넘는 폴란드인, 유태인을 학살한 곳이다. 

2차대전 직전의 독일과 소련의 밀약에 따라 독일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면서 폴란드의 서부는 독일 나치가 점령하고

동부는 소련이 침략을 하여 폴란드를 독,소가 나누어 가졌다.

유럽인들의 반유대정서는 뿌리가 깊다.

14세기 유럽에 신의 징벌이라는 흑사병이 창궐하면서 유럽인 약 3,000만 명이 죽고 사람들의 불안감과 불만이 늘어가자 화살을 대신 맞을 대상이 필요했던 위정자들은  유대인들이 우물에 약을 풀어 그렇다는 등의 유대인 원흉설을 부추기면서 반유대주의가 시작되었다. 1923년 칸토대지진 당시 7000명의 조선인이 희생당한 루머와 판박처럼 똑 같다. 이후 유대인 혐오증은 유럽 문학이나 암악에도 트렌드로 굳어진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욕심많은 상인 샤일록이 유대인인 설정처럼. 오늘날의 시각으로 본다면 제노포비아의 전형이다. 규제받지 않은 인종주의. 물론 나도 팔레스타인 문제와 미국 정치계를 뒤에서 움직이는 유대인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세월이 흐르면서 경제적으로 부유하지만 사회적 기여는 적었던 유대인에 대한 반감은 점점 높아가고 히틀러가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히틀러 집권 당시 독일은 1차 대전 패전국으로 전후보상비에 시달리며 경제공황에 이른 상태에서 독일 거주민 4%인 유대인이 독일 경제의 1/4을 주무르면서 요직을 그 유대인들이 차지하자 독일인들에게 게르만 민족 우월주의를 부추기면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유대인들이 말살시키려 했다.

유럽에서 불안감을 느낀 유대인들이 유대인에게 허용적인 폴란드로 모여 들면서 폴란드에 300만 명이 살게 된다.

독일은 제일 먼저 오시비엥침 지역을 점령했다. 이곳은 역청탄(세계 5위 매장량)이 많이 매장되어 있었고 전 유럽 국가들이 이곳에서 2,200km 반경에 들어올만큼 철도로 물자나 사람의 운송이 쉬운 곳이었으며, 상대적으로 한적한 시골이라 외부의 시선에 노출되지 않고 수용소 시설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폴란드 정치인 728명을 사살하고 다음에는 지식인, 어린이까지도 정치인으로 분류하여 죽였다. 그 후 신부, 소련군 포로, 독일의 불구자들, 수천년 동안 나라 없이 떠도는 집시와 유대인들을 끌고 와서 학살했다.

이 곳 제1 수용소는 2만평의 대지에 28개동으로 지어졌는데 60%는 파괴되었고 현재 남은 것은 약40%로 현지 가이드의 설명을 FM 수신기로 들으며 4호, 5호, 6호의 3개동 내부를 관람했다.

이곳에서는 폴란드의 유대인 뿐 아니라 유럽 각국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동쪽으로 가면 유대인끼리 거주할 땅이 있다며

기차의 화물칸에 실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송을 시켰는데, 이송된 유대인들은 군의관의 수신호에 따라 엄지를 들면 강제 노동, 검지를 아래로 하면 가스실로 보내졌다. 노동력이 없는 어린이, 여자, 노인, 장애인은 바로 가스실 행이었다.

가스실을 간신히 벗어난 사람들도 하루에 12시간 이상 노동에 헐벗고 굶주려 평균 수명 2개월이었으며 수용소 생활이 너무 힘들어 전기 울타리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는 이도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가스실로 보내지는 사람은 모두 옷을 벗겨 샤워를 시켜 준다면서 비누를 손에 들려 가스실로 보냈다. 짐 가방들은 샤워 후에 돌려주겠다며 이름과 주소를 적게 하였고 5호 수용소 내 전시실에 그 가방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가스실에서 죽은 사람들의 반지, 목걸이, 금니 등은 녹여서 모두 독일로 보냈으며 여자 머리카락은 깎아서 카페트, 남성 양복 등을 만들었는데 감촉이 아주 좋아 인기가 있었다.

자른 머리카락 무게만 해도 7톤이 넘었는데 쓰고 남은 머리카락을 쌓아둔 전지장에 들어선 순간 나도 모르게 “억!”하고 소리를 질렀다. 

시신은 인근에서 많이 생산되는 역청탄을 이용해 태우고 그 재는 비료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4호실로 들어가면 SS(나치 친위대)가 찍은 학살 사진이나 수감자들의 참혹한 모습들을 그린 그림들이 걸려 있는데 유럽 전역에서 아우슈비츠까지 끌려오는 모습과 수감생활 모습이 담겨 있다.

5호실에는 당시의 생활용품인 안경테, 신발, 의족, 목발, 유태인 부자들의 법랑 그릇, 요리집기, 타자기, 가방, 어린이 신발 35,000 켤레, 인형, 배냇저고리, 가죽 구두, 칫솔, 면도기, 구둣솔, 구두약 등이 종류별로 쌓여 있었다. 법랑 그릇이나 가방, 구두 등은 요즘 상품이라 해도 믿을 만큼 당시로선 최신, 최상의 상품으로 유대인들의 경제적 지위를 짐작케 했다.

6호실에서는 생활모습을 그린 그림이나 수용자들의 사진이 있었는데 40만 명의 기록이 있고 몸에는 문신을 새겨 정치범, 소련군, 동성연애자 등 표시를 하고, 유대인 중 폭력전과자나 깡패등으로 구성된 앞잡이 '카포'는 독일군보다 더 악랄했다고 한다.

임산부 강제 낙태, 맹인 만들기, 어린이 성기 제거 사진, 생체 실험, 어린이를 발가벗겨 한겨울 추위에 몇시간이나 견디는지, 서로 피부를 바꿔 이식하기, 쌍둥이를 대상으로 한 인체 실험 등 만행이 저질러졌다.

오늘날 독일의 제약기술이 발달한 것에 아우슈비츠에서의 인체 실험이 지대한 공헌을 했다니 참 아이러니다. 

마지막으로 가스실에 들어갔다.

들어가기 싫었다. 몇몇사람과 함께 밖에 남았다가 수용소 정문에 적힌 "당신들이 이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문구와

 눈을 뜨고 똑바로 보라는 내 안의 소리가 나를 컴컴하고 음습한 가스실 내부로 들여보냈다.

단체 샤워 명분으로 한 방에 350 명을 집어넣고 천정 가운데 큰 구멍을 통하여 해충 박멸제인 사이클론B로 약 15분~20분만에 그들을 저세상으로 보냈다. 죽음을 예감한 사람들이 출입구로 몰렸지만 너무 빽빽하여 선채로 죽어갔다는 가스실 입구 문 옆에는 고통을 겨니다 손톱으로 긁은 자국들이 선명하게 나 있다.

가스실 바깥에는 교수대가 있었다. 독일 패전 후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이었던 루돌프 헤스를 처형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란다. 가스실에서 채 20미터나 될까 3층집이 하나 있었는데 수용소장의 가족이 거주한 사택이라 한다. 바로 옆에서 하루에도 수백명이 죽어나가는 바로 옆에서 평화로운 저녁 시간을 보냈을 가족들의 모습이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잘못된 신념에 사로잡힌 인간의 집단적 광기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가 본 것은 1수용소였고 이 2만평의 1수용소가 모자라 약 3km 떨어진 곳에 10배 크기의 제2수용소를 만들었다.

제2수용소는 2,000 명을 한 방에 넣어 가스 질식 시켜 죽일 수 있는 방을 4개나 만들어 15분에 8,000명을 죽였다고 한다.

후에 제3수용소까지 합하면 약 30만평 대지 위에 300여개 동이 지어졌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런 수용소 시설이 전 유럽에 1,000개 이상이나 지어졌다고 하니 인간이 어디까지 잔혹해질 수 있을까 할 말이 없었다.

히틀러가 2차 대전을 일으켜 유럽인 5,000만 명이 죽었는데 소련인 2,000여만 명, 폴란드인 600여만 명, 유태인 400여만 명이 죽었다고 한다.

1945년에 전쟁이 끝난 후 수용소는 1948년에 지구상에서 전쟁을 몰아내자는 취지로 아우슈비츠 박물관으로 개조를 하였다.

폴란드인들에게 이 아우슈비츠는 수학여행의 필수코스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는지 계단이 닳아 있었다. 전세계 사람들이 이곳을 보러 오는데 그날도 각국에서 온 사람들로 북적거렸지만 이상하게도 일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우슈비츠에서 나와 폴란드의 경주라고 할 수 있는 두 번째로 큰 도시인 크라카우(현지이름 크라코프)로 이동을 했는데 버스에선 내내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방금 기차에서 내린 가족들, 이들은 이 사진에 찍힌 후 곧바로 가스실로 갔다.

사진 제목이 죽음으로 가는 길(on the way to death)이다.

 

크라카우에 도착하니 오후 햇살이 평화롭게 내리고 있었고

바벨성 아래 강가엔 자전거를 타거나 산책을 하는 사람들의 밝은 표정이 방금 다녀온 아우슈비츠가 마치 꿈속처럼 느껴졌다.

중앙시장광장의 두 개의 탑이 있는 성당을 보고 마차로 크라카우 시내를 둘러보았다.

주위에는 포장마차 시장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고 시장 바로 뒤에는 성모마리아성당이 있었다.

이 성당은 각기 다른 모양의 두 개의 탑이 있는데 이 탑을 만든 형제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더 높은 탑을 만들어 널리 칭송을 듣는 동생을 결국 죽이는 형이 만든 낮은 탑이 나는 오히려 아름다워 보였다.

이 탑 꼭대기에서는 지금도 매시 정각에 나팔수가 나팔을 불어 시간을 알리는 ‘헤이나’라고 하는 의식을 행한다.

도중에 나팔 소리가 갑자기 뚝 끊기는데 12 세기에 크라쿠프를 침략한 타타르족의 공격을 알리던 나팔수가 적의 화살을 맞고 숨진 것을 애도하는 의미라고 한다.

광장에 모인 젊은이들의 모습이 싱싱하고 마냥 예뻤다. 인근의 레스토랑에서 함박스테이크 같은 현지식 식사를 하였는데  아주 맛없는 식사였다.

 

 폴란드 아이와 사진 한컷, 뒤에 보이는 성이 폴란드 왕의 구전이었던 바벨성이다.

 

 

 

다음날은 약 70여km 떨어진 비엘리츠카(Wielicka)에 있는 소금광산으로 갔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지하 갱도 300km 중에 3km를 개방한다. 200만 년 전에 바다였던 곳이 지각변동으로 육지가 되고 바닷물이 증발한 후에 소금만 남아 암염이 되었다.

1996년까지 700년 넘게 7,500톤의 소금을 캐내었다. 본래 지하 1단계(지하 64m, 378계단)~9 단계(327m)까지 개발을 했는데 관광객들에게는 지하 1단계(64m)~3단계(135m)까지만 관광을 허용하고 있다.

길고긴 계단을 돌아 내려가면 소금으로 된 조각들이 즐비하고 맨 아래 가장 넓은 방은 성 킹카 성당으로 벽면의 조각과 천정의 샹들리에까지 모두 소금덩어리 조각들이다. 이 성당은 일반인들의 결혼식장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길이 54m, 폭 17m, 천정 10~12m의 웅장한 성당은 압권이었다. 조각들은 3대에 걸쳐서 이루어졌는데 광부 요셉 마르코프스키가 조각을 하다 죽으니 아우인 2대 광부 토마스 마르코프스키가 성당 안을 조각했고 그가 죽자 제3대 광부 안톤 비로테크가 1935 년 최후의 만찬 조각을 조각하였고 그 공로로 미술대학 교수가 되었다고 한다.

13세기에 폴란드의 크라쿠프 왕에게 시집을 가게 된 헝가리 킹카 공주가 폴란드에 소금이 부족한 것을 알고 친정아버지에게 소금 광산 하나를 결혼예물로 달라고 하였다. 킹카 공주는 이 소금광산을 결혼 선물로 받게 되었고 폴란드로 오는 길에 약혼반지를 이 광산 깊은 협곡에 던져 버리고 왔다. 그리고 폴란드에 와서 크라쿠프 시민들을 시켜 땅을 파게 하여 반지와 소금광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소금광산의 통로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다 보면 찾은 반지를 킹카공주에게 전하는 모습, 난장이 광부들이 광산을 캐는 모습, 박제 말이 소금 마차를 끄는 모습, 소금물을 물레방아로 빼내는 모습들이 보인다. 그리고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가 둥근 지구를 든 형상을 볼 수도 있다. 말은 지하 세계에서 약 5년간을 사는데 빛을 못 보아서 눈이 먼 채로 평생 그 곳에서 새끼를 낳으며 살았다고 한다. 나중에 타트라산 기슭에서 멍에도 안장도 없이 자유로운 말을 보면서 말 팔자도 천차만별이구나 하였다.

소금광산을 나와 이틀 동안 함께한 현지가이드와 작별을 하였다. 썩 잘생기지는 않았지만 독특하고 차분한 말투와 해박한 지식으로 믿음을 준 젊은이여서 그가 권한 쇼팽 탄생 200주년 기념 보드카를 두병이나 샀다. 이 보드카로 인해 친구는 나중에 인천공항에서 세금을 부과 받게 된다.